1.머리말
자연인(natural person)이 아닌 법인(legal person)도 범죄능 력이 있는가의 문제는 오래된 형법상의 주제이다. 우리나 라를 포함한 대륙법계 국가에서는 전통적으로 법인의 범죄 능력을 부정해 왔다(Park, 2012; Bae, 2011; Seong, 2011; Lee, 2011; Lee, 2007; Chung, 2007). 반면 영미법계에서는 법인도 범죄의 주체로 보는 경향이 있었다. 법인의 대표적인 형태 인 기업의 경우에도 다양한 형태의 형사책임이 문제되었 다. 근래에는 세월호 침몰사건을 계기로 선박침몰과 관련 하여 기업인 해운회사에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는지가 논 란이 되었다. 하지만, 선박운항에 책임이 있는 자연인과 별 도로 기업 자체에 대하여 형사책임을 인정하기는 법리상 어려움이 있기 때문에, 선장과 선원 등 운항관련 자연인들 만 기소되어 재판이 진행되었으며, 2014년 11월 11일 선장 및 선원 15명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되었다. 현재 우리의 법체계하에서는 자연인과 별도로 기업 자체를 기소하여 형 사처벌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러나, 현대의 위험사회(Risikogesellschaft)에서는 대량의 인명재해를 수반하는 대형사고가 빈발하고 있고 이에 대한 대책으로 기업에 대한 형사책임을 인정해야 한다는 논의가 활발하게 전개되고 있다. 예를 들어, 영국에서는 다수의 인 명 피해를 야기한 선박침몰사고와 열차충돌사고를 계기로 2007년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ct)이 제정되어 기업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게 되었다. 영국 이외에 캐 나다와 호주 등 영미법계 국가에서도 유사한 입법이 이루 어져 있다(Kim, 2010; Lim, 2007). 이러한 입법에 따르면 선 박침몰사고에 있어서 선박운항과 관련된 선장 등 선원 뿐 아니라 기업인 해운회사 자체도 형사처벌할 수 있다.
우리의 법체계상으로는 아직 자연인과 별개로 기업만을 형사처벌할 수는 없다. 그러나 세월호 침몰사건을 계기로 기업자체를 처벌하여 대형인명사고를 막을 수 있도록 해야 한다는 주장이 다시금 주목을 받고 있다.
본 논문에서 영국 등 외국의 사례와 입법례를 고찰하면 서, 해양선박사고로 인한 인명피해와 관련한 기업의 형사 책임의 문제를 법리적 측면과 입법론적 측면에서 고찰하고 자 한다.
2.세월호 사건과 기업의 형사책임
2.1.세월호 사건과 해운회사 및 경영진의 형사책임
세월호는 청해진해운이라는 기업의 소유이다. 청해진해 운의 대표는 김모씨였으나, 실질적인 최고경영자는 사망한 유모씨로 알려져 있다. 세월호 침몰사건과 관련하여 문제 는 청해진해운이라는 기업과 이 기업의 경영진을 형사처벌 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러나, 우리의 현행 법체계상으 로는 청해진해운과 그 경영진을 세월호 침몰 희생자들의 사망과 관련하여 직접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쉽지 않다. 선박운항과 관련하여 경영진의 구체적인 과실이 드러난다 면 회사의 경영진도 형사책임을 지겠지만, 경영진의 행위 와 선박침몰과 같은 사고와의 사이에 인과관계를 인정하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다. 실제 청해진해운 관련 인물들은 세월호 사건과는 별개의 업무상횡령 등의 혐의로 기소되었 다. 청해진해운의 대표 김모씨는 업무상 횡령과 배임 이외 에 선박침몰과 관련하여 업무상과실치사상의 혐의로도 기 소되어 1심에서 유죄가 인정되었으나, 자신은 세월호 증·개 축, 과적, 부실고박 등을 주도했을 뿐 실제 사고는 선장과 선원들의 잘못으로 일어났다는 주장을 고수하며 항소했으 며, 최종 확정될 판결의 내용은 아직 알 수 없다1).
기업의 경영진뿐 아니라 기업자체를 형사처벌하는 것도 법리상 어려움이 있다.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륙법계 국가 의 형법이론은 범죄의 주체를 윤리적 인격자로 보는 윤리 적 형법관에 토대를 두고 있으며, 법인의 범죄능력을 부정 한다. 따라서 원칙적으로 기업 자체는 형사처벌의 대상이 아니다(대법원 1984.10.10. 선고 82도2595 전원합의체판결). 세월호 사건에서도 청해진해운과 같은 기업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될 수 없다. 실제 세월호 침몰사건과 관련하여 청 해진해운이라는 기업자체에는 승객의 사망과 관련하여 아 무런 형사책임을 묻지 못하였으며, 다만 사고로 인하여 해 상에 기름이 유출된 부분에 대하여 해양환경관리법 위반으 로 기소되어 벌금형이 선고되었을 뿐이다2). 그러나 영국은 이러한 사례에서 기업을 형사처벌하기 위해 기업살인법을 제정하였으며, 사고에 대하여 책임이 있는 기업에는 거액 의 벌금형이 선고된다. 이러한 기업을 형사처벌함으로써 대형 인명사고를 미연에 방지하고자 하는 것이다. 국내에 서도 이러한 입법의 필요성에 대한 논의가 필요한 시점으 로 판단된다.
2.2.세월호 사건과 선장 및 선원들의 형사책임
세월호 사건으로 사망한 승객들에 대한 형사책임과 관련 하여 기소된 것은 기업이 아니라 선장을 포함한 선원 15명 이다. 그 기소 내용을 보면, 살인죄와 유기치사죄가 주로 문제되었다. 살인죄를 인정할 수 있는지 여부는 세월호 선 원들에 대한 재판의 최대 쟁점 중 하나였다. 세월호의 선 장, 1등 항해사, 2등 항해사, 기관장에게는 살인죄의 혐의가 적용되었다. 이들은 배가 곧 침몰하고 승객들이 사망할 것 이라는 사실을 알면서도 승객들에 대한 구호조치를 취하지 않고 먼저 탈출했으므로 부작위에 의한 살인죄에 해당한다 는 것이다. 살인죄가 인정되지 않는 경우는 유기치사죄가 검토될 것이다3).
이러한 기소 내용에 대하여 어떠한 판결이 내려질 것인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는데, 2014년 11월 11일 광주지방법원 형사11부에 의해 세월호 사건에 대한 1심 판결이 선고되었 다2). 1심 판결에 따르면, 살인죄로 기소된 선장과 선원 4명 에 대하여 살인의 고의가 인정되지 않아 부작위에 의한 살 인죄 부분은 무죄가 선고되었으며, 예비적 공소사실인 유 기치사죄에 대해서만 유죄가 인정되었다. 유기치사죄는 선 장과 선원 15명에게 공통적으로 적용된 혐의였다. 재판부 는 "선장 등은 승객들이 구조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과 승 객들의 퇴선을 위한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해 경이 구조할 것이라는 안일한 생각과 두려움 때문에 구호 조치를 하지 않은 점이 유죄로 인정된다"고 설명했다. 다 만, 기관장에게는 동료 선원인 조리사 2명에 대한 부작위 에 의한 살인죄가 인정되었다. 선장에게는 유기치사죄와 함께 업무상과실선박매몰과 해양환경관리법위반 부분도 유 죄가 인정돼 징역 36년이 선고되었다. 재판부는 선박 개조 와 화물 과적으로 인한 복원성 악화, 조타의 과실과 부실 한 고박으로 인한 화물 이동 등에 세월호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으로 보았으며, 세월호의 구조적인 문제점과 청해진해 운 경영진의 위법행위, 선박 운항시스템의 문제점도 사고 의 원인으로 지적했다.
세월호 사건 재판에서 선박침몰과 관련하여 주로 형사처 벌의 대상이 된 사람들은 선장과 선원들이다. 청해진해운 대표가 업무상과실치사상죄로 기소된 것을 제외하고, 임직 원들은 회사 경영과 관련된 비리로 기소된 것이며, 청해진 해운 자체는 해양관리법 위반으로 유죄판결을 받았을 뿐이 다. 선박운항과 관련된 직접 책임이 있는 기업의 하부조직 의 실무자들만 주로 처벌의 대상이 된 것이다. 이는 뒤에 서 살펴볼 영국의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사건의 재 판에서 기소된 회사의 경영진이 선박침몰에 대한 책임은 선박을 운항한 선원들에게 있다고 주장하였고, 이 주장이 받아들여져 선원들만 형사처벌받은 예를 상기시켜 준다. 영국에서도 이러한 법원의 판결은 여론의 많은 비난을 받 았고, 이는 자연인과 별도로 기업을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기업살인법의 제정으로 이어졌다. 우리나라의 경우도 법리 상 어려움은 있으나 대형인명사고를 초래한 기업은 관련 실무자뿐 아니라 기업 자체도 형사처벌할 수 있게 함으로 써 기업주의 책임의식을 고양시켜 이를 통해 대형 인명사 고를 예방할 수 있는 제도적 장치를 마련해야 할 것이다.
3.영국과 미국의 선박침몰사고와 기업의 형사책임
3.1.개요
영국에서는 철도가 민영화된 이후 발생한 열차충돌사고 로 다수의 인명피해가 발생하고, 카페리선의 침몰로 대형 인명재해가 발생하면서 철도회사나 선박회사 등 기업 자체 를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주장이 본격적으로 제기되었다. 영국에서는 종래 대위책임이론(theory of vicarious liability) 에 기초하여 피고용인의 행위에 대하여 고용주의 형사책 임이 인정되었다. 그러나 대리이론은 살인죄와 같이 주관 적 요소를 성립요건으로 하는 범죄에는 적용되기 어려웠 다(Harbour and Johnson, 2006). 예를 들어, 기업이 살인의 고 의를 갖는다고 보기는 어렵기 때문이다.
그 뒤 영국에서는 동일성이론(identification theory)에 기초 하여 고의와 같은 주관적 요소를 성립요건으로 하는 범죄 에 대해서도 기업을 기소하여 처벌할 수 있는 것으로 보았 다. 기업의 경영진의 행위와 의사는 곧 기업의 행위와 의 사로 볼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이론은 위반행위자 가 하위직원인 경우 적용하기 어렵고, 대규모기업에도 역 시 적용하기 어렵다는 문제점이 있다. 대형 인명사고를 발 생시키는 기업은 대개 대규모 기업이며, 그러한 사고에 직 접적인 책임이 있는 사람들은 대개 하위직급의 실무자들이 다. 따라서 동일성이론을 적용해도 법리상 기업에 형사책 임을 묻기는 어려운 것이다(Harbour and Johnson, 2006).
따라서 기존의 이론으로는 인명재해를 초래한 대규모기 업을 형사처벌하는 것이 어려웠으며 이를 극복하기 위해 새로운 입법이 요구된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로 193명이 사망하는 대형 인명사고가 발생하자 영국에서는 기업살인법의 제정을 통하여 기업자 체를 형사처벌할 수 있도록 법제를 마련하게 되었다.
이하에서는 영국과 미국에서 기업의 형사책임이 문제된 선박침몰 사고를 살펴보고, 영국의 기업살인법의 배경과 내용에 대해 고찰한다.
3.2.영국의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사고
1)사고의 개요
영국에서는 대형 열차충돌사고와 선박침몰 사고 등을 계 기로 기업에 대한 형사책임의 논의가 활발해졌다. 이 중 가장 대표적이며 영국 기업살인법의 제정에 직접적인 영향 을 준 사건이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사고이다. 이러 한 사건을 계기로 다수의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대형사고를 일으킨 기업에 대해서는 기업자체를 형사처벌해야 한다는 논의가 촉발된 것이다.
이 선박은 영국의 도버항과 벨기에의 제브뤼헤항(Zeebrugge) 을 오가는 카페리였는데, 1987년 3월 6일 밤 벨기에의 제브 뤼헤항에서 출항하자마자 침몰하여 155명 승객과 38명의 승무원 등 193명이 사망하였다. 이 선박은 승객 459명과 승 무원 80명, 81대의 자동차와 3대의 버스 및 47대의 트럭을 싣고 있었다. 이 선박은 로로선박(roll-on roll-off car ferry)이 었는데, P&O European Ferries라는 회사의 소유였다. 이 선박 은 경쟁이 심한 도버해협 횡단 항로에서 경쟁력을 갖추기 위해서 신속히 화물과 승객을 싣고 내릴 수 있도록 설계되 었으며, 수밀구획(watertight compartment)을 갖추고 있지 않 았다. 이 선박이 제브뤼헤항을 떠난 후 20여분이 지나 바닷 물이 곧 자동차를 선적한 갑판으로 넘쳐 흘러들어왔으며, 채 몇 분이 되지 않아 측면으로 기울면서 침몰하기 시작했 다. 이 선박이 항구를 떠난 직후 다량의 물이 자동차를 실 은 갑판으로 유입되었고, 결국 선박의 복원성(stability)이 상 실되면서 전복된 것이다. 배가 기울기 시작하면서 전복되 기까지는 채 2분도 걸리지 않았다. 배가 침수되면서 전기 가 끊겼고 배는 비상동력까지 상실하면서 완전히 어둠에 잠기게 되었다. 인근에 있던 준설선의 선원들이 이 선박의 불이 꺼진 것을 보고 항구에 알렸으며, 30분 후 구조 헬기 가 도착했고, 인근에서 훈련 중이던 벨기에 해군이 구조에 참여했다. 이 사고는 전시가 아닌 평시에 영국의 선박사고 로는 1914년의 RMS Empress of Ireland호 선박충돌사고 이후 가장 많은 인명피해를 야기한 사고였다(UK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1987)4).
이 사고의 사망자 대부분은 선실 내에 갇혀 사망했으며, 추위로 인한 저체온증이 원인이었다. 벨기에 해군의 구조 작업으로 다수의 승객이 구조되었으며, 이로 인해 사망자 를 줄일 수 있었다. 침몰의 가장 직접적 원인은 부갑판장 (assistant boatswain)의 과실이었지만, 이러한 직접적 원인 이외에 선박회사(P&O European Ferries)의 의사소통의 문화 (culture of communication)가 경직되어 있었고, 회사의 선원들 에 대한 관리 감독에 더 큰 문제가 있었음이 추후 공식조 사에서 밝혀졌다(UK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1987). 사고 후 이 선박은 인양되었으나 팔리지 않아 결국 대만의 고철 처리장에서 해체되었다.
2)사고의 원인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의 직접적 원인은 부갑판 장의 과실이지만, 이외에도 다양한 부수적인 요소들의 침 몰의 원인이 되었다. 침몰하던 날 이 선박은 벨기에의 제 브뤼헤항과 영국의 도버항 사이를 운항하고 있었다. 그러 나 이 항로는 이 선박이 통상 운항하던 항로는 아니었으 며, 제브뤼헤항의 부두와 선박을 연결하는 다리(linkspan)는 이 선박과 같은 급의 선박에 적합하게 설계된 것이 아니었 다. 이 사건의 조사 결과, 침몰의 직접적인 주된 원인은 세 가지로 밝혀졌다. 즉 첫째, 부갑판장이 갑판의 문을 닫지 않은 것. 둘째, 1등 항해사가 갑판의 문이 닫힌 것을 확인 하지 않은 것. 셋째, 선장이 갑판의 문이 열렸다는 사실을 모르고 출항 한 것이다. 부갑판장이 갑판의 문을 닫지 않 은 것은 침몰의 직접적인 원인(immediate cause)이었고, 1등 항 해사가 제 위치에 있지 않은 것도 중대한 문제였으며 이 또한 침몰의 원인을 제공한 것으로 판단되었다(UK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1987).
기타 조사에 따르면, 이러한 직접적인 원인 외에도, 형편 없는 직장 내 의사소통체계와 선박 운항자와 육상 관리자 들 사이의 소원한 관계 등이 역시 침몰의 원인이었다. 또 한 기업 조직체계의 모든 영역에서 부주의하고 대충하는 고질적인 병폐가 있었음도 밝혀졌다. 배의 구조와 관련해 서도, 갑판 문의 개폐 상황을 알려주는 표시등만 조타실에 설치되었더라도 사고를 막을 수 있었는데, 이렇게 극히 적 은 비용으로 해결할 수 있는 문제도 간과되고 있었다(UK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1987).
선박의 구조도 침몰에 원인을 제공했다. 수밀구획으로 구분되어 있는 다른 선박들과 달리, 로로선박(RORO vessel) 의 자동차 선적 갑판에는 수밀구획이 되어 있지 않았다. 이러한 갑판에 물이 유입되면 갑판의 처음부터 끝까지 전 체에 물이 차게 된다. 이러한 문제점은 1980년대 초부터 알려져 있던 사실이다. 그리고 제브뤼헤항의 시설에 맞게 선수의 끝부분을 조정했음에도 출항 전에 이를 다시 원상 태로 복구하지 않은 것도 사고의 또 다른 원인이었다(UK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1987).
1983년 Herald of Free Enterprise호의 자매선인 Pride of Free Enterprise호가 도버항에서 제브뤼헤항으로 가면서 역시 부 갑판장이 잠이 드는 바람에 선수문이 열린 채 출항했는데 전복되지 않았다. 따라서 선수문을 닫지 않은 것만으로 선 박이 전복된다고 할 수는 없다. 그러나,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 후 실시된 실험에 따르면 자동차로 타고 내리는 선박(RORO vessel)의 자동차 선적 갑판에 일단 물이 차기 시작하면 30분 이내에 전복될 가능성이 많은 것으로 판명되었다. 다른 실험에 따르면, 수밀구획이 설치되어 있 지 않은 경우 물이 자유롭게 유입되어 선박의 전복 위험성 이 높아지는 것으로 확인되었다.
선박의 전복에 일조한 또 다른 원인의 하나는 수심(depth of water)이었다. 선박이 수심이 얕은 바다를 빠른 속도로 항해할 때 예상했던 것보다 선박이 해저에 가까워지게 되 는 스쿼트효과(squat effect)가 발생하게 되는데, 이로 인해 선수문과 수면 사이의 간격이 좁아지게 되고, 선수문이 열 린 상태에서 수면보다 1.5미터 위에 있다 하더라도 결국 물 에 잠기게 된다. 이러한 결과는 이 후 실험에서도 확인되 었으며, 스쿼트효과도 이 선박의 침몰의 한 원인이 되었다 (UK Department of Transportation, 1987).
3)사건의 처리
이 사건으로 선박회사 관계자 7명이 중과실치사죄(gross negligence manslaughter)로 기소되었고, 선박회사인 P&O European Ferries Ltd는 기업살인죄로 기소되었다. 하지만, 최 종적으로 회사와 최고 경영진 다섯 명은 무죄판결을 받았 다. 이 사건의 처리과정에서 선박회사에 대해 법적 책임을 물어야 한다는 주장이 다수에 의해 제기되었지만, 법리상 기 업에 대한 처벌이 어려웠다. 당시의 동일성이론(identification theory)라는 영국의 법리에 따르면 기업을 살인죄로 처벌하 기 위해서는 그 기업의 경영진이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을 제공해야 하나, 이를 인정하기는 어려웠던 것이다. 대부분 사고의 직접적인 채임은 현장의 실무가에 있으며, 회사의 최고 경영진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을 입증하기는 어렵다. 선박침몰 사고의 경우에도 선장이나 선원 등 직접 선박을 운항하는 직원들에게 직접적인 책임이 있으며, 선 박회사의 경영진에게 사고의 직접책임이 있다고 보기는 어 려운 것이다.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사건에서도 해운회 사와 경영진은 사고에 대한 책임이 선박의 운항과 관련하 여 과실이 있는 선장과 선원들에게 있다고 주장했으며, 이 러한 주장이 받아들여져 선박회사와 경영진은 무죄판결을 받은 것이다. 결국 이러한 동일성이론의 법리에 따라 선박 회사와 경영진을 형사처벌할 수는 없었으며, 이러한 문제점 을 시정하기 위해 영국에서는 2007년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ct)이 제정되었다.
이 사고 이후 Herald of Free Enterprise호와 로로선박의 구 조에 대한 개선조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조치에는 조타 실에 갑판문의 개폐상태를 보여주는 신호등을 설치하고, 갑판의 앞부분에 방수 램프를 설치하도록 하며, 물이 차오 르는 상황에 대비하여 자동차 선적 갑판으로부터 물이 쉽 게 빠져나가는 장치를 설치하도록 했다. 또한 ⌜해상에서 의 인명안전을 위한 국제협약⌟(International Convention for the Safety of Life at Sea)도 개정되어 로로선박에서 요구되 는 자동차 선적 갑판과 해수면 사이의 간격이 기존의 76센 티미터에서 125센티미터로 늘어났다.
4)세월호 침몰사건과의 비교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사건은 세월호 침몰사건과 많은 유사점이 있다. 세월호는 선체의 구조를 위험하게 변 경하였으며, Herald of Free Enterprise호는 선체의 구조가 위 험하게 설계되었다는 점에서 선박구조상의 문제가 사고의 원인이 되었다는 공통점이 있다. 세월호와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모두 평상시 운항항로와는 다른 항로를 운항했 다는 점, 선박충돌로 인한 침몰이 아니라 운항상 과실 때 문에 침몰하였으며, 연안해역에서 측면으로 기울어져 침몰 하기 시작했으며, 피해자 대부분이 선실 내에서 탈출하지 못하고 사망했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세월호 재판과정에서 드러난 사실들을 종합하면, 세월호 침몰은 무리한 증·개축 으로 인한 복원성 악화, 화물 과적과 부실한 고박, 항해사 와 조타수의 운항 미숙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이다3).
그러나, 무엇보다 유의해야 할 점은 선박침몰의 직접적 인 원인은 선원들의 과실이겠지만, 또 다른 원인은 선박회 사의 의사소통 문화나 안전교육 등 경영상의 문제라는 점 이다. Herald of Free Enterprise호의 경우 회사와 경영진은 기 소되었지만 무죄 판결을 받았고, 결국 일부 선원들만 형사 처벌을 받은 것이다. 세월호 사건의 경우도 재판이 진행 중이지만, 선박침몰과 관련하여 기소된 것은 선장과 선원 들이다. 선박회사와 경영진에 대한 법적 책임은 법리상 인 정되기가 어려웠던 것이다. 이 두 사건에서 모두 선원들만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고 기업과 기업주는 처벌 대상이 되 지 않았다는 점도 공통점이다.
이러한 여러 가지 공통점에도 불구하고, 가장 큰 차이점 은 승객의 구조에 있다.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갑판장은 과실이 있었지만 헌신적인 승객 구조의 노력으로 법원이 이를 높이 사기도 했다. 그러나, 세월호의 경우 선장을 포 함하여 선원들 중 단 한명도 승객의 구조를 위해 헌신적으 로 노력한 사람이 없었다는 점은 두 사고의 가장 큰 차이 점으로 판단된다.
3.3.미국의 General Slocum호 사건
1)사고의 개요
General Slocum호는 뉴욕 인근을 운항하는 증기선이었는 데, 1904년 화재가 발생하여 뉴욕의 이스트리버에서 침몰하 였다. 이 사고로 1,342명의 승객 중 약 1,021명이 사망했다. 이 사건은 사망자 수로 보면 911테러 이전까지 뉴욕 인근 에서 발생한 가장 큰 대형 참사였다. 증기선인 이 선박은 처음 운항을 시작한 이래 선박의 고장과 충돌 사고로 많은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선장(Van Schaick)은 화재가 발생 한지 10여분이 지나서야 나타났다. 12살 난 아이가 화재가 났다고 선장에게 알렸지만 선장은 이를 믿지 않았다 (O'Donnel, 2003; Braatz and Starr, 2000).
선장은 화재가 발생했음에도 선박을 돌리거나 인근 선착 장에 정박하려 하지 않고 운항을 계속했다. 즉시 배를 멈 추어 정박하지 못하고 맞바람을 맞으며 운항을 계속한 결 과 화재를 급속하게 키웠다. 인화성 페인트도 화재를 걷잡 을 수 없게 했다. 선장은 나중에 재판에서 강가의 건물과 오일 탱크에 화재가 번지는 것을 막기 위해 노력한 것이라 주장했다. 일부 승객들은 강으로 뛰어들었지만 당시의 여 성복의 무게 때문에 수영이 불가능하여 대부분 익사했다. 많은 사람들이 선박의 윗층이 무너지면서 사망했고, 또 다 수는 물속으로 피하려다 여전히 작동 중이던 증기선의 외 륜(paddle)에 부딪쳐 사망했다.
이 사고로 승무원들은 40명 중 5명이 사망했다. 선장은 한 쪽 눈을 실명했는데, 조사에 따르면 배가 가라앉자마자 몇몇 승무원들과 함께 인근의 예인선으로 피신했다고 한 다. 이 사고 당시 많은 영웅적인 구조의 노력이 있었다. 특 히 인근 병원의 의료진과 환자들이 구조작업에 참여했는 데, 인간띠를 만들어 피해자들을 물에서 건져내기도 했다.
2)사고의 원인
선장은 승객의 안전에 대해 궁극적인 책임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선박 내 안전장비의 유지와 교체에 대한 아무런 노력도 하지 않았다. 소방호스는 방치되어 녹슬어 있었고, 승무원들이 불을 끄려하자 부서져 버렸다. 또한 승무원들 은 화재 진압 훈련을 받은 적이 없었고, 구명보트는 와이 어로 고정되어 묶여있었으며 사용할 수가 없었다. 생존자들 의 증언에 따르면 구명장비는 쓸모가 없었으며 사용하려하 자마자 부서져버렸다(O'Donnel, 2003; Braatz and Starr, 2000). 다급한 엄마들은 아이들에게 구명조끼를 입혀서 강으로 던 졌지만 아이들이 떠오르기는커녕 물에 잠기는 끔찍한 모습 을 보아야 했다. 당시 승객의 대부분은 인근 섬으로 피크 닉을 가는 여자와 어린이들이었으며, 대부분은 수영을 할 줄 몰랐다.
당시의 구명장비는 대부분 값싼 코르크를 사용하여 제작 된 것이었으며, 장비의 최소 무게 기준을 충족하기 위해 쇠막대기를 넣어 제작했다. 부실한 제작으로 구명장비의 캔버스천은 찢겨지고 코르크는 부서져버렸다(O'Donnel, 2003; Braatz and Starr, 2000). 이러한 구명장비는 제작된 후 13년 동안 갑판 위에 방치된 채 걸려있었다. 구명장비 제작사의 매니저가 기소되었으나 유죄로 인정되지는 않았다.
3)사건의 처리
이 사고로 8명이 기소되었다. 선장과 두 명의 안전감독관 (inspector), 선박회사(Knickerbocker Steamship Company)의 사 장, 비서, 재무담당자 등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오직 선장 만이 유죄판결을 받았다. 선장은 과실치사의 혐의를 비롯 하여, 적절한 소방훈련을 실시하지 않았다는 점과 소화기 구를 적절히 관리하지 못했다는 혐의로 유죄판결을 받았다 (United States v. Van Schaick, 134 F. 592(S. Dist. N.Y. Cir. Ct. 1904)). 선장은 10년의 중노역형을 선고받았으며, 3년 6개월 을 복역한 뒤 가석방되었다. 구명장비 제작사의 관계자는 무죄판결을 받았지만, 이 사고를 계기로 여객선의 비상용 장비의 개선을 위해 연방과 주의 관련 입법이 이루어졌다.
그러나, General Slocum호 침몰사건에서는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사건과 달리 선박회사도 형사처벌을 받았다. General Slocum호 침몰사고가 일어날 당시의 미국 법원은 고의를 범죄의 성립요건으로 하는 범죄에 있어서는 자연인 이 아닌 기업이 범죄의 주체가 될 수 없는 것으로 보았다 (Dunn et al., 2002). 그러나 General Slocum호 사건 판결에서 쟁점은 그 증기선을 운항했던 회사가 살인죄(manslaughter) 로 처벌될 수 있는지 여부였는데, 뉴욕주 법원은 기업인 선박회사도 살인죄로 형사처벌될 수 있다고 보았다. 이 사 건에서의 뉴욕주 법원은 선박회사가 구명장비를 제대로 갖 추지 못한 상태에서 선박을 운항하게 했고 이것이 원인이 되어 다수의 인명피해를 초래했으므로 이에 대해 법적 책 임을 져야 한다고 보았던 것이다(Harbour and Johnson, 2006). 뉴욕주 법원은 또한 이러한 사건에서 기업의 형사책임의 인정에 고의의 존재 여부는 요건이 아니라고 보았다.
4)세월호 침몰사건과의 비교
이 사건은 오래 전의 사고이지만, 세월호 침몰사건과 역 시 유사한 점이 있다. 무엇보다 선장이 사태에 적절히 대 처하지 못하였고, 일부 선원들과 함께 먼저 탈출했다는 점, 구명장비에 대한 관리가 적절히 이루어지지 않아서 사고시 에 사용이 어려웠다는 점 등이 유사점이다. 선원들에 대한 선박화재 대비 훈련이 거의 실시되지 않았다는 점도 공통 점이며, 무엇보다 경영진이 아닌 선장만 처벌을 받았다는 점도 유사하다. 그러나, 가장 큰 차이점은 General Slocum호 침몰사건에서는 선박회사가 형사처벌을 받았다는 점이다. 그 당시 미국에서도 법인에게는 고의범의 성립요건인 고의 가 인정될 수 없다고 하여 고의를 요건으로 하는 범죄에 대해서는 기업의 형사처벌을 부정하는 것이 일반적인 견해 였는데, 이 사건에서는 예외적으로 기업의 형사책임을 인 정한 것이다.
4.영국의 기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ct)
4.1.기업에 대한 형사책임의 법리와 문제점
우리나라를 비롯한 대륙법계 국가는 원칙적으로 자연인 만을 형사책임의 주체로 보고 법인의 범죄능력은 부정한 다. 하지만 영국에서는 동일성이론(identification theory)과 같 은 법리에 따라 고의가 성립요소인 범죄에 대해서도 기업 의 형사책임을 인정하였다(Almond and Arthur, 2013). 기업의 경영진은 기업을 대표하며 경영진의 의사는 곧 기업의 의 사라 할 수 있으므로, 경영진의 범죄에 기업이 형사책임을 진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일성이론은 기업의 경영진 이외 에 실무직원들의 행위에 대해서는 적용될 수 없다는 난점 이 있다. 또한 동일성 이론은 소규모회사에는 적용이 가능 하지만, 대규모회사의 경우는 구체적인 사고와 관련하여 경영진의 직접적인 과실을 인정하기가 어렵기 때문에 적용 에 난점이 있다(Kim, 2010). 대규모기업의 경우 복잡한 구조 로 되어 있어 개별적인 업무집행은 경영진 이외의 실무자 들이 담당하기 때문에 동일성 이론을 적용하여 기업 자체 에 형사책임을 묻기 어려웠던 것이다(Jung, 2013).
영국에서는 이후 앞에서 살펴 본 1987년의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사고와 1997년의 Southhall 기차 충돌사고5) 를 계기로 동일성이론을 극복하고 기업에 대한 형사처벌이 가능하도록 기업살인법이 제정되었다. 이 두 사건 모두 다 수의 인명피해를 야기하였으며, 관련 실무자뿐 아니라 기 업 자체에 대한 형사책임을 요구하는 여론이 높았으나 모 두 기업은 형사책임의 대상에서 제외되었다. 이는 무엇보 다도 동일성이론에 따라 기업의 경영진 또는 지휘부가 개 별 사건과 관련하여 구체적인 책임이 있다는 것이 입증되 어야 하는데, 해당 기업의 다수 경영진 중 법적 책임이 있 는 개인을 특정하기가 쉽지 않았기 때문이다. 영국에서는 이러한 기업의 처벌에 있어서 법리상의 난점을 극복하기 위한 노력의 결과로 기업살인법이 제정되었으며, 기업살인 법의 제정에는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사고와 같은 대형 인명재해가 그 배경이 되었던 것이다.
4.2.영국의 기업살인법의 내용
영국은 10여 년간의 입법준비작업을 거쳐서 2007년에 기 업살인법(Corporate Manslaughter and Corporate Homicide Act 2007)을 제정하였다(제정경위에 관한 자세한 것은 Jung, 2013; Roh and Kang, 2014). 종래 영국에서는 동일성이론에 따라 경영진이 개별 사건과 관련하여 현장실무자들의 주의 의무위반을 인식하는 등 구체적인 책임을 인정할 수 있는 근거가 있어야 기업에 대한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었다. 그러나 영국의 기업살인법은 동일성이론과 달리, 기업의 전체 관리체계나 운영체계가 구체적인 실무를 담당하는 하 위직원의 주의의무위반을 방지할 수 있었는가에 중점을 둔 다. 실무자의 주의의무위반을 경영진이 몰랐던 경우라도, 그러한 주의의무위반이 기업의 전체 관리시스템의 문제점 에서 기인한 것이라면 기업에 대한 형사책임을 인정할 수 있 다고 본다(영국의 기업살인법의 목적에 대해서는 Todarello, 2003; 기업살인법의 비판에 대해서는 Wells et al., 2000).
영국의 기업살인법은 조직체(organization)나 조직의 구성 원이 피해자의 사망을 야기하고, 사고와 관련된 그 조직체 의 주의의무(duty of care) 위반의 정도가 중대한 경우 조직 체, 즉 기업을 형사처벌한다.6) 기업살인법은 조직체의 예로 기업(corporation) 이외에 일정한 정부부처나 기관(department or other body), 경찰(police force), 고용주(employer)인 동업회 사(partnership), 노동조합(trade union), 고용주협회(employer's association)도 함께 규정하고 있다.7) 조직체가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기 위해서는 조직체의 상급관리자(senior manager) 가 조직을 관리하고, 상급관리자의 조직의 관리 및 구성의 방식에 중대한 의무위반이 있는 경우 조직체는 형사처벌된 다.8) 중대한 위반(gross breach)이란 조직체의 주의의무 위반 (breach of a duty of care)이 특정한 사례에서 그 조직체에 합리적으로(reasonably) 기대되는 수준에 크게 미치지 못한 경우를 의미한다.9) 조직체의 경영진 또는 상급관리자(senior manager)에 관한 개념정의를 보면, 전체적으로 또는 상당한 부분에 있어서 조직의 활동과 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 을 하거나, 사실상 조직의 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하는 사람들을 뜻한다.10)
기업살인죄의 성립 여부는 조직체의 관리와 운영체계가 적절했는가에 달려있다. 조직의 실무자가 개별 사건에서 피해자의 사망의 결과와 관련하여 주의의무 위반이 있었는 가는 기업살인죄의 성립요건이 아니다. 전체적인 관점에서 조직체 내의 관리와 조직의 방식이 타당했는가에 초점이 있으며, 개개 사건에서 경영진이나 실무자의 주의의무 위 반이 있었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그리고 개별사건에서 피 해자의 사망에 대하여 조직체에게 책임이 인정되며 조직체 의 개개 구성원은 기업살인법의 적용대상이 아니다(Jung, 2013). 조직체의 구성원인 개인은 기업살인죄로는 처벌되지 않지만, 형법상 과실치사죄나 산업안전보건법 위반죄로 처 벌될 가능성이 있다.
기업 등 조직체에는 자유형이 선고될 수 없으므로, 기업 등 조직체가 기업살인죄로 유죄판결을 받는 경우 벌금형이 선고되는데 선고되는 벌금형에 상한은 없다. 영국에서 기 업살인법이 실제 적용된 사례를 보면, 기업의 연매출액의 20 %에서 연매출액의 115 %에 이르는 벌금형이 선고되었다 (Sim, 2013). 이는 기업살인법에 위반한 기업에 대해서는 더 이상 기업의 경영이 어려울 정도의 벌금형을 선고함으로 써, 기업으로 하여금 다수의 인명이 희생되는 사고를 미연 에 방지하는데 모든 주의를 다하도록 유도하려는 것이다.
5.기업처벌을 위한 입법의 필요성
5.1.법인의 범죄능력과 기업살인법
우리 형법학계의 다수 견해와 대법원의 입장은 자연인이 아닌 법인은 범죄의 주체가 될 수 없고, 형사처벌의 대상 이 아니라는 것이다. 따라서 기업 등 법인에 대한 형사처 벌을 긍정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법체계가 변화해야 한다는 난점이 있다. 종래 우리 법체계하에서도 자연인의 행위와 연계하여 법인의 형사책임을 긍정하는 입법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기업살인법은 위법행위를 한 자연인과 별개로 기 업을 처벌하려는 것이므로 기존의 입법형태와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러나, 현실적인 법적문제의 해결의 필요성이 있는 경 우라면 법이론도 이를 반영하여 변화해 가야 할 것이다. 실제 영국에서 기업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입법이 이루어 져 있고, 미국의 경우에도 다양한 사건에서 기업에 대한 형사책임이 인정되고 있는 점을 고려한다면, 자연인과 별 개로 기업을 처벌하는 입법이 불가능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이론은 그 자체가 목적이 아니라 현실적인 사회문제의 해결의 도구여야 한다는 점에서도, 법이론상의 난점을 극 복하는 입법은 필요한 것으로 판단된다(기업의 형사책임을 인정하려는 해석론으로는 Lim, 2007).
5.2.대형 인명사고의 예방과 기업살인법
현대사회를 위험사회라 한다. 위험사회에서 사람들은 다 양한 위험에 노출되어 있다. 육상과 해상을 망라하여 열차 와 선박 등의 사고로 인하여 대형 인명재해가 발생하는 것 은 각국에서 문제가 되고 있다. 특히 해상에서의 선박침몰 사고는 다수의 인명피해가 수반되므로 자연인과 기업을 망 라하여 이에 대한 책임이 있다면 법적 책임을 물을 수 있 는 입법이 이루어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과거 영국의 Herald of Free Enterprise호 침몰사고에서처럼 선장이나 선원 이 처벌되고 경영진이나 회사는 형사처벌 대상에서 제외됨 으로써 사고에 대한 궁극적인 책임이 있는 기업과 경영진 은 처벌을 면하는 문제점이 있었다.
Herald of Free Enterprise호나 세월호와 같은 대형선박 침 몰사고의 원인을 보면, 비록 직접적인 원인은 선장이나 선 원의 선박 운항상의 과실이지만, 기업과 같은 조직체의 관 행과 조직의 운영방식이 궁극적인 사고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 이 경우 관련 실무자들에게만 형사책임을 묻는 것은 타당하지 않으며, 선박회사와 경영진을 형사처벌함으로써 책임의 소재를 분명히 하고, 추후 기업 조직의 차원에서 대형사고의 예방대책을 수립하도록 하는 것이 타당하다.
우리의 경우도 세월호 재판에서 보는 바와 같이 선박침 몰과 관련하여 선장과 선원들만 형사처벌의 대상이 되고 있지만, 근본적인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기업과 경영진 을 형사처벌할 수 있는 입법이 필요할 것이다(국내의 기업 살인법 논의에 대해서는 Lee, 2012). 이러한 입법은 단순히 기업을 가중하여 처벌하려는데 목적이 있는 것이 아니라, 다수의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대형사고에 대한 기업의 경각 심을 일깨우고 기업의 인식과 기업문화를 쇄신하여 대형인 명재해를 예방하고 안전한 사회를 마련하기 위한 것으로서 현대의 위험사회에서는 특히 요청되는 입법이라 판단된다.
6.맺음말
다수의 인명피해를 야기하는 대형사고의 위험은 어디에 나 존재한다. 특히 해상에서의 선박침몰은 가장 심각한 결 과를 초래하며, 우리나라뿐 아니라 영국과 미국 등 많은 나라들이 해상 선박침몰로 인한 대형인명사고를 겪으면서 그러한 사고를 막기 위한 다양한 법적 제도적 장치를 마 련하고 있다. 이 중 대표적인 것이 Herald of Free Enterprise 호 사건을 계기로 영국에서 입법된 기업살인법이다. 이러 한 입법은 대형인명사고에서는 개인보다는 기업의 관리 및 조직체계와 기업의 문화가 사고의 최종 원인인 경우가 많 으며, 결국 궁극적인 책임은 기업에 있으며, 기업 자체를 형사처벌함으로써 이러한 대형참사를 예방하겠다는 취지가 담겨 있다.
우리나라 다수 학자의 견해와 대법원의 판례는 법인의 범죄능력을 원칙적으로 부정하는 입장을 취하므로, 자연인 과 별개로 기업을 독자적으로 처벌하는 입법은 법리상 난 점이 있다. 그러나 세월호 사건에서 보는 것처럼, 사고의 직접적인 원인은 선장과 선원들의 과실이라 하겠지만, 궁 극적으로는 선박과 선원에 대한 기업의 관리체계와 경영의 방식이 사고의 원인인 경우가 많다. 따라서 하위직 실무자 들에 대한 형사처벌보다는 기업과 고위 경영진에 대한 형 사처벌이 더 필요한 측면이 있다. 세월호 침몰사고와 유사 한 참사를 이미 겪은 영국은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하 여 기업살인법을 입법하였다. 우리의 경우도 이러한 형태 의 입법을 고려해보아야 할 것으로 판단된다.
근래 대규모 기업의 운영과 관련하여 다수의 인명피해를 수반하는 사고가 빈발하고 있다. 선박의 경우도 대형화 되 면서, 선박회사의 관리 경영상의 문제는 곧 대형 해상참 사로 이어진다. 이러한 사고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최종 책 임자인 회사와 경영진에 형사책임을 물을 수 있어야 하며, 이를 위해서 법인의 형사책임을 인정하는 새로운 법리에 기초한 입법이 이루어져야 한다. 이는 외국의 입법례 비추 어 법리상 가능한 작업이며, 현 상황에서 대형 사고의 방 지를 위해서도 필요한 것이라 판단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