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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SSN : 1229-3431(Print)
ISSN : 2287-3341(Online)
Journal of the Korean Society of Marine Environment and Safety Vol.19 No.2 pp.155-163
DOI : https://doi.org/10.7837/kosomes.2013.19.2.155

고대 동중국해 사단(斜斷)항로에 대한 해양기상학적 고찰

김성준*†
*국립목포해양대학교 교양과정부

A Maritime Meteorological Research on the Ancient Sailing Route between Silla Korea and Tang China in the East China Sea

Sung-June Kim*†
*The Faculty of Liberal Arts & Science, National Mokpo Maritime University, HaeyangDaehak-Ro 91, Mokpo, 530-729, Korea

Abstract

The ancient sailing routes between Silla Korea and Tang China have been a hot issue among the researchers. Some assert that the Korean seafarers under Chang Po-go sailed the East China Sea directly from China to the Korean Peninsula with the assistance of mariner´s compass on boarding V-shaped vessels in the 9th century. As we all know, Chinese used the mariner's compass in the 11th century and Europeans in the 12th century. In this paper, the author analyzed the maritime meteorological condition for sailing ships to navigate in the East China Sea and retraced the rafting route by Yun in 1997. As the results of analysis, the author confirmed that the maritime meteorological condition might be favorable for the seafarers to be capable of navigating in the East China Sea from China to Korea in June and July. But even the sea condition might be favorable, it must be God's will for the ancient seafarers to reach the Korean Peninsula. On Yun´s rafting account, the author found out that there is a difference between the sailing route drawn by Yun himself and the actual drifted route and the raft drifted at 1.7~2.0 knots. This was quite an extraordinary speed considering the unfavorable sea condition and raft itself without keel. In conclusion, the author reaffirms that it was after the year 1068 for the seafarers to navigate in the East China Sea directly from China to Korea without any historical proofs or evidences.

155-163.pdf2.29MB

1. 서 론

 한국 고대해양사 연구는 1927년 일본인 나이토 순보(內藤雋輔)에 의해 시작되어 1998년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가 출범한 뒤 2000년대에 크게 활성화되었다(Kim, 2006b). (재)해상왕장보고기념사업회의 출범 목적이 장보고의 업적을 드높이기 위한 것이었던 만큼, 연구자들이 장보고의 활동상에 대해 현양할 수밖에 없었음은 당연하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들은 역사적인 사료나 확실한 근거를 제시하지도 못한 채 장보고 선단이 첨저선과 나침반을 사용하였다고 주장하고 있다(Choi, 2005; Yun, 2003). 우리 선박사에서 고대 첨저형 배모양 토기 몇 점을 제외하고, 한선은 평저선이 기본선형이었다는 것이 정설이고, 항해에 나침반이 활용된 것은 중국이 11세기 말이고 유럽이 12세기 초라는 것이 세계 학계의 정설이다(Kim et al., 2003).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 연구자들은 장보고 선단이 한중간을 자유롭게 왕래하였다고 전제하고, 이렇게 항해하기 위해서는 첨저선과 항해 나침반을 사용하지 않으면 안된다고 주장하고 있다.

 이들의 주장은 단순히 주장에 그친 것이 아니라 장보고의배를 복원하는 과정에 반영되어 장보고 선은 첨저선과 평저선을 결합한 선형으로 복원되었다. 당초 평원저선으로 설계되었던 장보고선이 첨원저선형으로 결정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장보고 무역선 복원 연구>(2006)에 상세히 정리되어있다. 뿐만 아니라 뗏목을 통해 고대 한중간 항로를 탐사함으로써 이를 입증하려고 시도한 바도 있다(Yun, 1997). 이와 같은 주장과 시도는 다른 한편에서 ‘발해 탐사대’에도 영향을 미쳐 러일간 발해항로 탐사 시도로 이어졌으나 실패로 끝나고 말았다. 1997년 12월 ‘발해1300호’의 탐사는 탐사대원4명의 사망으로 귀결되었고, 2005년 2월 ‘발해2005호’의 탐사시도는 불과 출항 4일만에 실패로 끝났다. 이와 같은 정황을 고려한다면 학자들의주장은 민족주의적 자부심에 근거한억측이 아니라 엄격한 사료 비판과 증거, 이를 바탕으로 한 합리적 논증을 기반으로 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된다.

 고대 한중간 항로에 대해서는 수많은 연구자들이 다양한 연구와 주장을 설파한 바 있다. 그 가운데서도 쟁점이 되는것은 한중간 사단항로, 즉 한반도의 서남단(이를테면 흑산도)과 중국 강남의 닝보(寧波, 唐代의 명칭은 明州)를 직선으로 잇는 항로인 동중국해 사단항로다. 중국 저장성의 닝보에서 흑산도까지는 직선거리로 약 450마일, 주산군도(舟山群島) 최동단의 보타도(普陀島)에서 흑산도까지는 약 330마일이다. 보타도에서 흑산도까지 2노트로 항해할 경우 7일 내외면 항해가 가능하다.

 이 논문에서는 고대 동중국해 사단항로에 대한 다양한 견해를 종합적으로 검토하고, 항로의 이용 가능성을 해양기상학적 관점에서 검증해보고자 한다. 물론 필자는 장보고가 활동했던 9세기 중반에는 우리나라는 물론 중국도 항해에나침반을 이용하지 않았다는 전제하에 연구를 진행할 것이다. 설사 일부 연구자들의 주장처럼, 장보고 선단이 9세기에 나침반을 항해에 이용했다고 하더라도 해도나 동력 장치, 기상장비와 통신장비가 전혀 없었던 고대에 바람과 해·조류가 범선 항해에 가장 큰 영향을 미쳤을 것임은 자명하기 때문에 주로 바람, 해류와 조류, 안개를 중심으로 분석할 것이다. 또한 이 항로를 뗏목으로 탐사함으로써 ‘9세기 사단항로 개설설(開設說)’을 입증했다는 주장도 비판적으로 재검토해 볼 것이다. 이를 위해 2에서는 고대 동중국해 사단항로에 대한 기존 연구들을 정리하고, 3에서는 사단항로상의 해양기상 여건을 분석한 뒤, 4에서는 뗏목 탐사에 대해 재구성해 볼 것이다.

2. 고대 동중국해 사단항로 연구 현황

 우리 학계에서 통시대사적으로 우리 민족의 항해와 항로에 대해 전문적으로 연구한 이는 손태현이 처음이라 해도지나친 말이 아니다. 그는 『한국해운사』에서 선사시대의 한중간 해상교통로로 노철산 수로와 황해 횡단항로가 있었고, 통일신라시대에도 기상의 악화로 인해 조난당하거나 당의 국정의 혼란으로 길이 막힌 경우를 제외하고는 황해 횡단항로가 이용되었음을 밝혔다(Sohn, 1982, pp.28-31, 42). 그는 또한 서해 남부 사단항로가 6세기 말에 존재했으나 주항로가 아니었고, 1074년 이후에 주항로였다고 밝혔다(Sohn,1982, pp.35, 86). 그가 기점으로 삼은 1074년은 고려 문종 28년으로, 宋史 高麗傳에 “往時, 高麗人往反, 皆自登州, 七年(宋熙寧7年) 遣其臣金良檻來言, 欲遠契丹, 乞改塗, 由明州詣闕, 從之”라는 구절에 따른 것이다. 김재근은 동중국해 사단횡단로가 장보고 시대 이후에 개발되었다고 밝혔다. 김재근도 장보고 시대에는 노철산수로와 황해횡단항로가 주로 이용되었고, 11세기 후기에 들어서 문종 28(1074)년 무렵부터 고려와 송 간의 해상왕래의 중심지가 산동반도의 등주에서 강남의 명주(明州, 현 寧波)로 옮겨지고, 이에 따라 항로도 동중국해 사단항로로 내왕하게 되었다고 적시하였다(Kim, 1985,p.129).

 허일 등은 닝보나 취안저우(泉州)에서 제주도를 거쳐 완도를 거쳐 신라로 가거나, 일본으로 가는 명주 항로가 이미장보고 시대에 이용되고 있었으나, 주로는 11세기 이후에 이용되었다고 밝히고 있다. 그 근거로 청해진 유적지의 발굴된 월주요(越州窯)에서 만든 것으로 추정되는 청자편, “명주에서 떠난 배가 바람을 따라 신라로 들어갔다”는 엔닌의 기록 등을 들고 있다(Hugh et al., 2001, pp.324-5). 중국의 신웬어우(辛元歐) 또한 장보고 선대가 중국의 닝보에서 완도까지직항하였다고 주장하였다. 신웬어우는 장보고 선대가 동중국해 사단항로로 항해했음을 입증해주는 사료는 없지만, 청해진 유적지에서 발굴된 청자 조각이 명주 월주요 산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근거로 들고 있다(Xin, 1999, p.125).

 정수일(무함마드 깐수)은 고대 한중간에는 북방연해로(한반도 서남해연안↔산동반도까지의 연해로), 남방연해로(한반도 서남해 연안↔산동반도↔중국 동남해 연안을 잇는 연해로), 북방횡단로(한반도 서남해안↔산동반도 직항로), 남방횡단로(한반도 서남해안↔화중, 화남연안 직항로)로 구분하고, 그 이용 시점을 사료를 통해 제시하였다. 그에 따르면,북방연해로는 고조선 전기(중국의 夏代, BC 21∼16세기)부터 이용되었고, 남방연해로는 삼국과 발해가 중국 남조와 교류시 이용하였으며, 북방횡단로는 북방에 발해가 자리잡고 있어 육로 및 북방 연해로를 이용할 수 없었던 통일 신라기에주로 이용되었고, 남방횡단로는 통일 신라기에 이용되었다(Jung, 1996, pp.217-58).

 이들 이외에도 단일 논문이나 저서 등을 통해 장보고의 항로에 대해 언급한 연구자 대부분은 시기상의 차이는 있지만, 장보고 시대에 남부 사단항로(明州 항로)가 이용되었다는 견해가 주류를 형성하고 있다. 정진술이 정리한 바에 따르면, 남부 사단항로에 대한 기존 견해는 크게 ① 1074년 이전 이용설(이용범, 최근묵, 이해준, 신형식, 이도학, 오봉근,김정호, 윤명철, 권덕영, 김성호, 이기동, 최근식, 강봉룡, 김형근 등), ② 이전에도 존재했으나 1074년 이후 주항로 이용설(김상기, 손태현, 김재근, 孫光圻, 정수일, 허일 등), ③ 1074년 이후 주항로 이용설(진단학회, 해군본부, 정은우, 정진술)등으로 삼분할 수 있는데, 수적으로는 ①설 주창자들이 가장 많다(Jeong, 2002, p.210-3).

 그 가운데서도 최근식과 윤명철은 가장 강력한 ①설의 주창자들이다. 특히 최근식은 이제까지의 학계의 통설을 깨는 파격적인 주장을 내놓았다. 그는 장보고 선단이 이미 나침반을 항해에 이용하였고, 고유의 선형을 보유한 선박을 사용하여 명주와 청해진을 잇는 최단 항로로 항해하였다고 주장하였다(Choi, 2005, p.204). 그러나 이와 같은 그의 주장은“원사료가 아닌 여러 문헌에 서술된 문장을 인용하고 문구를 빌어 확대 해석했다”는 비판을 받았다(Kim, 2006a, p.204).그럼에도 불구하고 최근식은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할 수 있는 사료나 전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기존 주장을 견지하고있다. 그는 2012년 11월 완도에서 개최된 장보고국제학술회의에서 “9세기 장보고 무역선단은 가탐이 기술한 연안항로 등 우회항로를 통행한 것이 아니라 최단거리의 직항로(동중국해 사단항로)를 택하여 동아시아 해역을 신속하게 항해하였고, 이 직항로를 일반적으로 이용했던 것으로 판단된다”고 주장하였다(Choi, 2012, pp.25-44).

 윤명철도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닝보나 주산군도 해역에서 출발하여 북상하다가 동으로 방향을 틀면 제주도 권을경유하여 일본으로 갈 수 있는 항로로서, 장보고 선단이 청해진을 중간 거점으로 삼아 황해 연근해 항로를 장악하였으므로 이 항로의 실질적인 주인이었다”고 주장하였다(Yun,2003, p.239). 그는 나아가 “신라인들이 항해에 나침반을 사용했을 가능성이 있다”고 언급하면서, “1997년 6월 자신이 뗏목으로 탐사한 항로와 서긍의 기록과 일치했다”면서 동중국해 사단항로가 “신라인들이 사용한 매우 중요한 항로였다”고 밝혔다(Yun, 2002, pp.210, 213, 239).

 정진술은 장보고 시대의 한일 및 한중항로, 그리고 장보고 이후의 항로에 대한 기존 연구를 전면적으로 재검토하여 의미 있는 연구성과를 냈다(Jeong, 2002). 그는 1927년 이마니시 류(今西龍)가 한중일 항로에 대해 언급한 것에서부터2001년 사이에 발표된 41개 연구성과를 항해술적 관점에서 재검토하였다. 그는 먼저 황해의 가시거리를 계산하여 도시한 뒤, 나침반이 없는 원시 항해술 시대에는 ‘정방향 대양항해’에 크게 의존했고, 자연 현상을 이용하여 항해했다는 대전제하에 기존 연구를 비판적으로 재검토하였다.

 정진술은 이어 장보고 시대에 남부 사단항로가 이용되었다는 주장의 근거가 되는 사료들을 면밀하게 검토한 결과,장보고 시대에 사단항로가 이용되지 않았음을 밝혔다. 그는 장보고 시대에 남부 사단항로가 이용되었다고 주장하는 견해에는 3 가지 선입견이 내포되어 있다고 보았다. 첫째, 우리나라의 선박들이 중국의 강소성 이남 지역에 도착 또는표착한 기록을 직선항로로 항해했을 것. 둘째, <入唐求法巡禮行記>에 기록된 9세기 선박들이 한중일 3국간을 활발히오갔기 때문에 남부 사단항로로 당연히 이용했을 것. 셋째,일본의 견당선들이 이른바 남로를 따라 큐슈에서 양자강 하구 지역으로 직항했는데, 항해술이 일본 보다 우수했던 신라선도 당연히 남부 사단항로로 직항했을 것. 정진술은 첫번째와 두 번째 선입견은 논리적 비약이거나 명백한 오류라는 점을 분명히 한 뒤, 세 번째 선입견 즉, 일본의 견당선들이 남로를 활발하게 이용했는데, 일본 보다 우수한 항해술을 보유한 신라선들도 당연히 남로를 이용했을 것이라는 주장을 재검토하였다. 그는 15차에 이르는 일본의 견당사 선의항로는 불분명하지만, 대략 4회 정도 남로를 이용한 것으로추정하고, 777년 일본의 고지마(五島)를 출항한 12차 견당선이 문헌상 처음으로 남로(동중국해 사단항로)를 이용하였다고 밝혔다. 정진술은 838년 15차 견당선까지만 해도 그리 성공적이지 못했던 남로 항해가 9세기 중엽에 이르면 어느 정도 성공 가능성이 있는 항로로 발전했음을 보여주고 있지만, 그렇더라도 남로 항해 시도가 그렇게 일상적으로 이루어졌다고는 보기 어렵다고 보았다(Jeong, 2002, pp.267-70).

 정진술은 또한 엔닌의 견당선이 무중항해시에도 닻을 내리지 않고 항진을 계속했다고 해석하여 이를 나침반을 사용했음을 보여주는 증거로 제시한 최근식의 주장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였다. 그는 엔닌이 속한 견당선 3 척 중 2 척은양자강 북단의 양주 해안에 도착하였던 데 반해, 엔닌이 승선한 견당선은 2척과 200마일 이상 북쪽에 위치한 강소성의 해주 해안에 도착했다는 사실을 들어 나침반을 이용했다면 상상할 수 없는 항해술이라고 비판하였다(Jeong, 2002,pp.262-5). 정진술은 결론적으로 “장보고 시대 이후에도 한중간에는 황해도 남서단과 산동반도를 잇는 서해중부횡단항로가 계속 이용되었고, 10세기 초부터는 서해중부횡단항로가 강소성 연안을 거쳐 절강성 연안까지 이어지게 되었으며, 이때에 흑산도에서 회하 하구에 이르는 새로운 서해남부횡단항로도 1068년 이후부터 이용되기 시작하였다”고 결론지었다. 1068년도는 고려 문종 22년으로 李燾 撰, 續自治通鑑長篇 권 339에 神宗 元豊 6년 9월 조에, “天聖以前使由登州入 熙寧以來皆由明州”라는 기록에 근거한 것이다.(Jeong, 2003,87 & 91).

 필자 또한 동서양의 나침반 발전사를 비교 검토함으로써 9세기에 신라인들이 나침반을 항해에 이용하였다는 최근식의 주장을 반박하였다. 필자는 중국에서 개발된 나침반이 아랍인을 통해 유럽으로 전해졌다는 통설은 잘못된 것이며,명확한 사료가 발굴되기 전까지는 나침반을 항해에 활용한시점은 중국에서는 1098년, 유럽에서는 1187년이라는 점을재확인하였다. 또한 동서양을 막론하고 지남기가 항해에 활용되기까지 자석 발견→指南浮針(floating magnetized needle)→축침(pivoted needle)→콤파스 카드(compass card)의 순서로 동일한 발전 과정을 거쳤다는 점도 간과해서는 안된다는 점도 밝혔다(Kim et al., 2003).

3. 동중국해 사단항로의 해양기상 분석

 앞의 2에서는 고대 동중국해 사단항로에 대한 여러 학자들의 견해를 정리해 보았다. 여기에서는 동중국해 사단항로의 해황(海況)을 분석해 볼 것이다. 고대 중국과 한반도 사이에 이른바 동중국해 사단항로가 이용되었음을 문헌적으로 확인할 수 있는 것은 고려 시대인 1068년 이후다. 그렇다고해서 1068년 이후 양국간의 사단항로가 연중 아무런 제한없이 이용된 것은 아니다. 김상기의 연구에 따르면, <高麗史>에 송상(宋商)들의 내방 시기가 7∼8월에 집중되어 있는데,이는 동지나해의 남풍 계열의 탁월풍을 이용해야 했기 때문이다(Kim, 1984, pp.65-68). 따라서 이 소고에서는 장보고 시대인 9세기에 동중국해 사단항로가 이용되었을 가능성을 검토하기 위해 주로 6∼8월의 동중국해의 해양기상학적 여건인 바람, 해류와 조류, 안개에 대해 분석해 볼 것이다.

3.1 바람

 국립해양조사원이 발간한 <근해항로지>에 따르면, 동중국해의 바람은 6월에는 북동 무역풍이 동경 170도에서 북위30도에서 남으로 북위 5도까지, 동경 150도에서 북위 15도까지 분다. 풍향은 거의 일정하고 7월에는 오오츠크해와 캄차카 연안에 걸쳐 있는 오가사와라(Ogasawara) 고기압으로부터 남풍과 남서풍이 탁월하게 불고, 남반구로부터 남동 무역풍이 그 세력을 확대하여 필리핀 제도, 베트남, 동중국해에서 편향하여 남서풍이 된다(KHOA, 2005, p.21).

 동중국해의 6∼8월의 바람은 평온하고, 쓰시마 동측에서 고토 열도 일부 해역과 남서 제도 주변 해역을 제외하고는 평균 풍력 3 이하가 된다. 7월은 상순에서 중순에 걸쳐 장마전선이 정체하는 시기에 해당하므로 큐슈 서쪽 해역에서 중국 남부에 걸쳐서 평균풍력 3 이상의 바람이 불고, 이 시기에 남서제도 북부 해역에서는 평균풍력 4 이상이 되기도 한다(Table. 1).

Table 1. Prevailing Wind in the Eastern China Sea

 고대 한중간 항로에서 중국 측 출항지인 닝보(寧波)의 출입구인 주산군도(舟山群島)의 기상 여건도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영국의 수로국이 1984년부터 2007년까지 관측한 자료에 따르면, 5월부터 8월까지 주산군도 입구인 딩하이(定海) 인근의 풍향은 남동풍이 탁월하고, 동풍과 남남동풍도 우세하다. 풍속은 풍력계급 4 이하이다. 이는 고대 중국인들이 한반도를 향하여 주산군도를 출항할 때 상당한 어려움에 처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출항하자마다 동풍 내지 남동풍에맞닥뜨리게 되어 중국 연안으로 떠밀릴 수 있기 때문이다(Fig. 1).

Fig. 1. Wind Direction and Forces at Dinghai(1984 2007). Source : UK Hydrograhic Office(2011), Vol.3, p.57.

 동중국해 사단항로의 풍향과 풍속에 대해서는 한양대학교의 나정열 교수팀이 1978년부터 1995년까지 관측한 자료를 원용할 수 있다. Fig. 2는 나정열 교수팀의 관측 자료인데, 주산군도→흑산도 상의 풍향은 6월에는 남풍, 7월에는남남서풍, 8월은 남동풍이 탁월함을 확인할 수 있다. 평균풍속은 풍력계급 3∼4 이하다.

Fig. 2. Wind Direction and Forces in the Far Eastern Seas. Source : Na Jungyul & Seo Jangwon, 1998.

 이상에서 살펴본 바를 정리해 보면,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출항지인 주산군도에서는 출항 직후 동풍이나 남동풍이 불어 중국 연안으로 떠밀릴 위험이 상존하지만, 일단 연안을 벗어날 경우 6∼7월은 남풍이나 남서풍을 타고 비교적 수월하게 한반도 남반까지 항해할 수 있으나, 8월에는 남동풍이 탁월하여 주산군도에서 흑산도 방향으로 직선으로 항해하기 어려웠을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3.2 해류와 조류

 바람과 함께 범선 항해에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해류와조류다. 동중국해에는 쿠로시오(黑潮) 해류가 흐르고 있어서 고대인들의 범선 항해에 유용하게 이용되었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쿠로시오 해류는 고온·고염분의 난류로, 평균유속은 2∼3 노트이고, 최강 유속은 4∼5 노트에 달하기도 한다. 그러나 해역에 따라 유로의 변동이 예상 밖으로 격심하다(KHOA, 2005).

 동중국해의 해류는 여름철에는 거의 모두 북동류(0.5 노트이하)지만, 겨울철에는 대륙을 따라 0.7 노트 이하의 남하류가 발생하고, 북동류는 쇠퇴하여 중앙부의 해류는 불규칙하게 된다. 황해의 해류는 대한난류로부터 갈라져 제주도 서쪽을 통과하여 황해로 유입하는 난류인데, 봄철인 4월부터 북상하기 시작하여 여름철인 8월에 0.4 노트의 최강 유속으로 발해까지 유입하려는 경향을 보이나, 그 세력은 매우 미약하다. 발해로부터 산동반도와 중국 대륙을 따라 남하하는 중국대륙 연안수가 있어 두 해류가 만나는 해역인 황해 중부에는 환류를 형성하고 황해 저층냉수의 남하 현상을 볼수 있다. 가을철인 10월부터 황해 난류의 강세와 북서 계절풍에 의한 서해 연안수가 형성되어 남하하기 때문에 난류가 서해안으로 북상하지 못하고 제주해협을 동류하고 있으며 일부는 제주도 남쪽으로부터 멀리 떨어져 서해 중앙부로 유입하는 약한 세력이 있다. 남하류의 유속은 겨울철인 3월이 0.4노트로서 가장 강하다(KHOA, 2005, p.43). 이상에서 정리한 바를 요약하면, 쿠로시오 해류는 동중국해의 대륙붕의 외선을 타고 북상하여 오끼나와를 거쳐 큐슈 남쪽에 도달하고, 본류는 일본 열도의 동쪽을 지나 태평양으로 빠져나가고, 지류는 한국의 남해안으로 향한다고 할 수 있다. 그 지류의 한 줄기가 계속해서 대한해협을 거쳐 동해로 빠지고, 다른 한 줄기가 황해난류가 되어 황해로 북상한다(Jeong,2002, p.243).

 동중국해 사단항로상의 쿠로시오 해류의 유향과 유속을 파악하기 위해 관측 해류도를 검토해 보았다. Fig. 3은 일본의 히다카 고우츠쿠(日高 孝次) 교수의 <海流の話>에 실려 있는 해류도인데, 동중국해 사단항로상에는 대만에서 제주도동단으로 북동향의 순조가 강하게 흐르는 반면, 주산군도→흑산도 방향의 항로상에서는 오히려 연안의 남동향의 역조가 흐르는 것으로 나타나 있다.

Fig. 3. Current in the Far Eastern Seas. source: cited from Jeong(2009), p.17.

 Fig. 4는 영국 수로국에서 발행한 동중국해의 6∼8월의 해류도인데, 동중국해 사단항로의 출항지인 주산군도에서는 북북동향으로 흐르다가 제주도 서남단에서 북동향으로 바뀌어 흑산도 내지 한반도 남단으로 흐르는 것으로 나타나고있다. 이는 고대인들이 이 해류를 타게 될 경우에는 중국 남부에서 한반도 남단까지 범선으로 항해할 수 있었음을 보여주고 있다.

Fig. 4. Current in the Eastern China Sea. source : UK Hydrographic Office(2011), vol.3, p.20.

3.3 안개

 안개 또한 범선의 항해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치는 요인의 하나다. 중국 근해에서 안개의 출현도는 겨울철에서 여름철에 걸쳐 다발구역이 북쪽으로 서서히 이동하므로 시기적으로 눈에 띄게 변화가 있다. 안개는 환절기인 5월에 황해 전역으로 확산된다. 6월에는 북위 25도 이북의 안개 발생 구역은 확산이 계속 된다. 7월에는 황해와 발해에서 안개가 많이 발생하기 때문에 이 달에는 중국 해안의 안개 발생 구역은 한국 연안의 안개 발생구역과 접속되며, 그 중심구역은 산동반도의 동쪽이고 출현도는 20 %이다. 안개가 많은 달은 절강성과 강소성의 연안에서는 3∼5월이고, 황해 및 발해에서는 6∼7월이다(KHOA, 2005, p.38).

 이상에서 정리해 본 바와 같이, 바람이나 해류, 안개 등을 종합적으로 고려할 때, 비록 기상 여건이 유리한 6∼8월이라하더라도 주산군도에서 한반도로 범선 항해를 하는 일이 그리 수월한 일이 아니었다고 할 수 있다. 그런데 1997년 윤명철이 뗏목으로 주산군도에서 출발하여 흑산도를 경유하여 인천까지 완항하였다. 뗏목으로 동중국해 사단항로를 항해하였다면, 이보다 감항성이 좋았을 20∼30톤급 범선이 이 항로를 항해할 수 있었음은 두말할 나위도 없다. 따라서 4에서는 그의 항해기를 재검토해 볼 것이다.

4.‘뗏목 탐사’의 재구성

 Fig. 5는 항해기에 도시(圖示)된 뗏목 항로도인데, 6월 28일과 29일 이틀 동안 태풍으로 역행한 것을 제외하고는 거의 직선으로 항해한 것으로 그려져 있다. Fig. 6은 항해기에 단편적으로 기록된 선위를 수로국 해도 No. 101에 도시한 뒤 직선으로 이은 것이다. 이를 보면 뗏목 항해기에 도시된 항로와 실제 항로와는 다소 차이가 있지만, 실제 이동로 역시 일부를 제외하고 전체적으로 직선에 가까운 항로로 이동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Fig. 5. Sailing route by Yun(1997). source : Yun(1997), p.182.

Fig. 6. Redrawn Yun's Sailing route.

 Table 2는 뗏목 항해기에 단편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항적과 해황을 재정리한 것이다. 항해기가 일정한 양식에 따라기록된 것이 아니기 때문에 정확한 항해 조건과 기상 상태를 파악하기가 수월하지 않다. 하지만 단편적으로 언급된기사들을 종합적으로 검토하여 뗏목 항해의 실제를 추정해 볼 수 있다. 추정은 6월 18일과 7월 1일의 위치 사이의 항정을 다양한 기준에 따라 추산하고, 항해 시간을 다양한 조건에 따라 추산하여 속력을 계산해 내는 방식으로 할 것이다.

Table 2. Sailing & Drifting Records by Yun(1997)

 먼저 6월 18일 정오 선위와 7월 1일 새벽 2시의 위치간 직선 항정(①)은 280마일이고, 실제 뗏목의 이동 위치를 직선으로 연결한 항정의 총 거리(②)는 433마일이다. 그러나 뗏목으로 각 선위간을 직선으로 항해하지는 못했을 것이고, 바람방향에 따라 태킹(tacking)을 하지 않으면 안되었을 것이다.

 30여년간 대양 요트 항해에 종사한 전문 요트인의 경험에 따르면, 현대의 30˝급 레이서(racer) 요트의 경우 실제 항정보다 20∼30 % 정도를 더 항해하고, 30″급 크루저(cruiser) 요트의 경우에는 30∼40 % 정도를 더 항해해야 한다. 선저판(keel)이 없는 뗏목의 경우에는 기상 여건에 따라 실제 항해거리가 40∼70 %까지도 늘어나게 된다. 실제 뗏목이 항해한거리를 20 %, 30 %, 40 %를 추가로 항해한 것으로 가정하여 추산하면 각각 ③ 520마일, ④ 563마일, ⑤ 606마일이 된다. 전체 항해시간은 즉 6월 18일 정오부터 7월 1일 새벽 2시까지 총 12일 14시간, 즉 302시간이 된다. 이상의 다섯 가지 조건에 따른 뗏목의 이동 속도는 0.9~2.0노트 범위에 있게 된다. 그러나 ①은 뗏목 실제 항해하지 않은0 가상의 항로이고, ②는 뗏목이 선위간 직선 항로가 항해했을 때의 항정으로 그 가능성은 전무하다. 그렇다면 뗏목은 1.7~2.0노트로 이동했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Table 3. Assumed Sailing Distance and Speed

 이와 같은 뗏목의 이동 속도는 탐사 당시의 기상 여건과 일반 선박의 표류 속도와 비교할 때 이례적으로 빠른 것이라 할 수 있다. 우선 탐사 기간 동안의 기상 여건이 좋지 못했다. Table 2에 정리된 바와 같이, 이 기간 동안 아무 문제없이 항해한 경우는 4일 정도이고, 그 외 8일은 역풍과 역조,태풍, 돛 수리, 돛대 수리 등으로 정상적인 항해가 불가능했다. 또한 정진술이 최부(1488), 하멜(1653), 승려 풍계(1811),제주 어선(1990)의 표류를 분석한 바에 따르면, 이들의 표류속도는 직선거리로 표류한 것으로 가정할 경우 0.55~1.6노트에 지나지 않았다(Jeong, 2009, p.56). 특히, 1990년 제주도소형어선은 142시간 동안 직선 거리로 77마일을 표류하여 0.55노트로 표류한 데 불과하였다. 정진술은 “표류 당시 강한 북서풍이 15~20노트로 불었고, 해류도 북동류가 평균0.6노트로 흘렀으며, 해류와 복합된 조류가 남서 내지 북동류로 0.4~1.5노트로 흘렀음에도 선체 높이가 낮은 어선이 강한 바람을 받았을 때는 표류 속도가 매우 느리다는 것을 입증한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밝혔다.

 이상에서는 1997년 윤명철의 동중국해 뗏목 탐사를 재검토해 보았다. 검토 결과 첫째, 항해기에 도시된 항로도와 항해기에 기록된 실제 위치 간 이동 경로가 차이가 있었고, 둘째, 이동 속력을 검증해 본 결과 뗏목의 일반적인 이동 속력보다는 상당히 빠르게, 그것도 동력선의 항적과 유사한 직선 항로로 이동한 것으로 나타났다.

5. 결 론

 이제까지의 분석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첫째, 해양기상학적 측면에서 하계인 6∼7월 사이에 동중국해의 바람은 남풍 계열이 풍력계급 3∼4 내외로 불어 중국에서 한반도로 항해를 시도해 볼 수 있지만, 주산군도 출항 직후 동풍과 동남풍 계열의 바람이 탁월하여 역풍에 맞닥뜨릴 수 있다. 해류와 조류 또한 중국 연안에서는 약한 역조가 흐르고 있어서 주산군도에서 출항 직후 연안으로 밀릴수 있다. 그러나 연안을 어느 정도 벗어나게 되면 남풍 계열의 탁월풍을 타고 주산군도에서 한반도 남해안까지 범선으로 항해할 수 있는 최소한의 여건이 형성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이와 같은 우호적인 기상여건에도 불구하고, 6∼8월이 장마와 태풍이 내습하는 철이라는 점을 고려하면 동중국해 사단항로가 그렇게 녹록한 항로가 아니었을 개연성이 컸다고 할 수 있다. 5월 말과 6월 초에 형성된 강우대가 북위30° 이남에 위치했다가 북상하기 시작해 화난(華南) 지방과오키나와(沖繩)를 거쳐 6월 말에 한국에 장마를 가져온다. 태풍 또한 6월부터 10월까지 집중되고 있다. 1951∼1995년까지 6월에 1.8개, 7월에 4.0개, 8월에 5.7개, 9월에 5.0개, 10월에 4.1개의 태풍이 한반도에 내습하였고(cited from Jeong, 2002),중국 연안의 절강, 복건 및 대만도 6~9월 사이에 태풍이 집중되었다(KHOA, 1999). 태풍과 장마를 고려하게 되면 주산군도에서 한반도 남단까지 바람과 해류를 타고 항해할 수 있는 최상의 여건을 갖춘 달은 5월뿐이라고 할 수 있다. 하지만 5월에는 안개라는 부정적 요인이 상존하고 있다. 이와 같은 기상 여건을 종합적으로 고려한다면 고대인들이 동중국해를 사단으로 항해하여 한반도로 항해한다는 것은 전적으로 천운(天運)에 좌우되었던 문제였다고 할 수 있다.

 둘째, 1997년 뗏목 탐사의 경우 제시된 항로도와 실제 위치와는 다소 차이가 있었고, 뗏목이 평균 1.7∼2.0노트로 거의 직선에 가까운 항로로 이동하였음을 확인하였다. 킬(keel)이 없고, 자체 동력이 없는 뗏목이 주산군도와 흑산도 간을거의 직선으로, 그것도 일반 선박의 표류 속력에 버금가는속력으로 항해했다는 사실을 고려할 때, 이는 매우 이례적인 경우였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뗏목 탐사가 고대인들의 동중국해 사단항로 직항했음을 입증하는 사례로 인용될 수 없을 것으로 판단된다.

 이상의 분석 결과를 종합해 볼 때,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사료상의 출발지와 도착지간을 직선으로 잇는다거나, 하계의 남풍과 쿠로시오 해류를 타고 주산군도에서 한반도 남단으로 항해할 수 있었다거나, 몇몇 표류나 탐사 등의 사례를들어 장보고 시대에 주항로로 이용되었다고 주장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결론적으로 고대 동중국해 사단항로는 추가적인 사료의 발굴이 있기 전까지는 1068년 이후 주항로로 이용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사 사

 이 논문은 (사)해양환경안전학회 2012추계학술발표회(2012. 11. 22, 완도)에서 발표된 내용을 수정·보완한 것임. 귀중한 자료를 제공해주신 김웅서 박사님과 김성대 센터장님(KIOST), 심문보 박사님과 이호정 연구원님(KHOA)께 고마움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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